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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성경적인가?

David Taeseong Lee 2020. 5. 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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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성경적인가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마6:9-13).
 

Lord's prayer,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1)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 또는 목사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 예배를 마칠 때 (목사가 있는 교회의 예배는 목사의 축도로 마침)

(2) 수요 예배나 금요 기도회 등 기도회 성격의 예배를 마칠 때

(3) 전도사나 교육 전도사 등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교역자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를 마칠 때(전도사나 교육 전도사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라도 마치는 시간에 목사가 와서 축도를 하는 경우도 있음)

(4) 가정 예배를 마칠 때

(5) 교회의 각 기관에서 회의를 마칠 때

(6) 기타 주로 공식 예배 외의 예배나 집회 또는 모임을 마칠 때
 

이처럼 주기도문은 주로 예배를 마칠 때 많이 암송하고 있습니다.
또 주기도문은 목사가 없을 때 축도 대신 암송하기도 하며 목사가 있어도 예배의 성격에 따라 주기도문 암송으로 예배를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목사가 참여하지 않은 예배를 끝날 때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이유를 물으면 많은 분들이 주기도문에 축도와 비슷한 영적/물적 축복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개신교회와 달리 자유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그런지에 대해 성경적으로 알아보고 그 이유와 주기도문 암송에 따른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배경
 

‘주님의 기도’ (Lord's prayer)는 실제로 주님이 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쳐 준 대로 형식에 가득한 위선적인 기도를 늘 반복해서 암송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유대인들의 이런 잘못된 기도 관행을 고쳐주시기 위해 이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마 6:5, 킹흠정] ¶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마 6:6, 킹흠정]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마 6:7, 킹흠정]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마 6:8, 킹흠정]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

 

이 말씀이 끝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 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오용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7절에 있듯이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면 자기들의 신이 기도를 잘 들어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제외한 이방 종교의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싫어하시며,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이 주어진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여전히 주기도문을 글자 그대로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기도문이 무슨 특별한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외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붓지 단순히 암기한 말들을 암송하지 않습니다(빌4:6-7).
 

[빌 4:6, 킹흠정]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빌 4:7, 킹흠정]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미국의 교회들 중에 주기도문을 시도 때도 없이 암송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역적 미국이 아닌 침례교와 자유교회들을 말함)
 

한국에서는 아마도 복음을 받아들인 뒤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주기도문 암송을 강요한 것이 지금까지 교회의 규례로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도문 암송 관행은 먼저 로마카톨릭 천주교회를 통해 중국에 전달되었고 그 뒤에 한국의 개신교회에도 전달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도


천주교회
(로마 카톨릭)는 기도에 대해 무어라 말할까요?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 봅시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곧 기도하자면 먼저 기도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제4편 p.903 #2650]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인용문에서 우리는 심각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두 가지 진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그 반대입니다!
성경에는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한 기도의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내가 내 목소리로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산에서 내 말을 들으셨도다. 셀라] (시3:4).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나를 고치셨나이다] (시30:2).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62:8).
 

로마 카톨릭주의의 기도는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기도문에 쓰여 있는 단어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이교도들이 하는 행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기도 방법을 금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마6:7).

 

★둘째,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교리 문답서는 성경이 성도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카톨릭 교회가 있어야만 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가 있기 오래전에도 사람들은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료하사 그들이 자녀들을 낳게 하셨으니] (창20:17).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주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민11:2).
 

성경의 성도들은 카톨릭 교회의 도움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연 발생적인 감정의 표현을 인정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장려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에 박힌 듯이 주기도문 같은 것을 암송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진심 어린 기도를 우리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교리적 문제


★★★
1. 율법적 구문 ★★★
 

주기도문에는 신약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말 성경에는 ‘빚진 자들’ 이 ‘죄 지은 자들’ 혹은 ‘잘못한 자들’ 로 되어 있으나 ‘빚진 자들’ 이 맞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11절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시 51:11, 킹흠정]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1, 개역개정]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 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님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신약시대에는 한 번 구원
받으면 성도 안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한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 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에 대한 구절은 성경에 너무 많으므로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시대에 살면서 헤매게 됩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 라는 구절도 사실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모든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독립
침례 교회 성도들과 자유교회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 2.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


로마카톨릭의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을 번역할 때 사용된 바티칸 사본의 본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도 마태복음 6장 13절에 각주를 달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은 고대 사본에 없다고 표시하였습니다. 개역성경이 말하는 그 고대 사본이 바로 로마카톨릭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성경 원본에 이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 주어진 책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는 메시아 왕국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기 위해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주신 것입니다.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 3. ‘대개’ 의 문제 ★★★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대개’
라는 말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대개’ 를 넣어 암송하기도 하고 어떤 교인들은 뺀 채 암송합니다.

그럼 ‘대개’ 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
라는 그리스어 접속사 - 영어로는 for - 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의 앞부분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이유는 [메시아]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1930년대에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던 때에 ‘중국어 성경’ 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경에서 ‘大槪’ 혹은 ‘大蓋’ 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 번역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
는 ‘대체로’ 혹은 ‘대략’ 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중국 성경도 ‘以’ 또는 ‘因爲’ 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의 경우 1936년 신약성경에는 ‘대개’ 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 라는 뜻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 가 들어가 있습니다.


 

★★★ 4. ‘나라’ 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 이 임한다 ★★★
 

그냥 ‘나라’ 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왕국’ 이 땅에 임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주제입니다.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하늘의  왕국’
(Kingdom of heaven)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천국’ (Heaven)이 아닙니다.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성경에서 ‘하늘’(Heaven)로 번역되었습니다. 기존의 우리말 성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3:2; 4:17) 등에 나오는 천국은 원래 ‘하늘의 왕국’ 이며 이것은 결코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 즉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중국어 성경을 참조하여 우리말 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중국어 번역처럼 ‘천국’ 으로 번역하여 교리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신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왕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며 (엡1:6; 12; 14)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왕국에 대한 개념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물었으며 (마2:2) 그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마4:17).

또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 위의 명패에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 라는 글이 붙었습니다 (마27:37).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왕으로 즉 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을 그들에게 제시하셨으나 / 배척당하시고 / 결국 그들의 왕으로 돌아가시면서 새 상속 언약 즉 신약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국을 잘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였으며(막1:1, 14) 그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구절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 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땅에 임하게 하사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왕국 즉 ‘하늘의 왕국’ 을 제시하셨습니다 (마4:17).

 

하늘의 왕국은 대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이미 오래전에 예언된 왕국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시는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왕국입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마지막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단2:44).
 

예수님은 바로 이 왕국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시고 침례자 요한의 사역과 각종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분을 거부했고(마23:37-39)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전달되었습니다(롬11:30-31).

 

[롬 11:30, 킹흠정] 너희가 지나간 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이 믿지 아니함을 통해 긍휼을 얻었나니

 

[롬 11:31, 킹흠정] 이와 같이 이 사람들 또한 이제 믿지 아니한 것은 너희가 얻은 긍휼을 통하여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늘의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한편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선포될 복음도 천국 복음이 아니라 왕국의 복음입니다.
 

[ 24:13-14, 킹흠정]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 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서 ‘끝까지 견디는 자’ 는 목숨을 내걸고 주님께 헌신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이 끝나는 때까지 견디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1차적으로 앞으로
휴거 이후에 다가올 7년환란에 대한 말씀이며,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으로 7년 환난기를 통과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른 뒤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 는 말씀이 성취될 때에 구원받는 자들입니다 (롬11:26).

 

[롬 11:26, 킹흠정]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
 

그래서 7년 환난기에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 는 왕국의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고 / 그 이후에 우리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서 이 땅에 문자 그대로 1,000년 동안 메시아로서 철장 권세를 가지고 천년왕국을 세워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실한 성도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랐고 (눅2:30-34; 38)

그래서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왕국의 도래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구속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고 실망에 잠겼지만
(눅24:21)
[눅 24:21, 킹흠정]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

그분의 부활 소식을 듣고는 그분이 승천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왕국의 회복에 대해 물었습니다.
[행 1:6, 킹흠정]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왔을 때에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 하매
 

이때에 그분께서는 왕국의 회복이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므로 너희는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고
[행 1:7, 킹흠정]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때나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이에 그들은 왕국의 회복을 바라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강하게 권면했습니다
(행3:19-26).


복음의 초기에는 이렇게 왕국의 회복과 관련해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이방인들의 구원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유대인들의 회개가 거의 불가능함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복음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훼파시키고 유대인들을 추방하여 왕국의 회복은 이방인들 중심의 교회 시대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약의 대언자들이 말하고 예수님이 초림 때에 세우려 했던 하늘의 왕국은 그분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에서 문자 그대로 위엄 있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존의 우리말 개역성경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모든 성경에서 왕국으로 번역된 ‘kingdom’ 은 성경에 342회 나오며 이것은 원래 ‘왕권’ (kingship)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주로 왕이 다스리는 통치 체제 즉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단어를 ‘나라’
나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게 번역하면 성경의 핵심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인본주의자들은 누가복음 17장 20-21절 등을 인용하며 천국이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기존 우리말 개역성경의 ‘나라’
는 원래 왕국입니다. ‘왕국’ 을 ‘천국’ 혹은 ‘나라’ 로 바꾸는 것은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를 완전히 가려 성도들의 성경 이해를 가로막는 심각한 폐해를 낳으며, 그 결과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이스라엘 대체신학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주기도문은 바로 이 ‘하늘의 왕국’ 이 유대인들에게 속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유대인들이 간구해야 함이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말 개역성경은 이런 기본적인 교리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용어가 바뀌어
변경되어 있습니다.


 

 

♥♥♥ 주기도문에 대한 결론 ♥♥♥
 

‘주님의 기도’ 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하나의 모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며
, 기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들을 알려줍니다.
또한 주기도문은 결정적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도드릴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임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기도의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가 기도드릴 대상입니다. 기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면 되는것입니다. 대상이 바뀌거나 혼동되면 안됩니다.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 외에도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
죄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
사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 등의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은 반복해서 외우는 것을 금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샘플 기도입니다. (반복해서 이교도들 처럼 외우는 것은 주님이 금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잘못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그대로 암송해 드리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어떤 성도가 진심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은 그분과 교통하는 것이며 또 우리 마음에서 진심으로 흘러나오는 말이지 우리가 암송하는 특정한 형태의 말이 아닙니다. 매번
반복되는 아무런 감정도 뜻도 모르며 입으로만 암송하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서 믿음으로 나오는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필요한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개신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도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아무생각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주기도문을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
라는 구절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잘 모르는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하고 진리로 잘 인도해야 합니다.
 

신약 교회의 초기부터 자유교회 성도들은 주기도문의 정신을 살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에게 경배하며, 그분의 왕국이 이 땅에 속히 임할 것을 기도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기도해 왔습니다.

다만 예배 때마다 끝에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일은 반복하는 말로 암송 기도를 하지 말라는 주기도문 제정의 목적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런 까닭에 예배에서는 암송하지 않습니다.
 

[마 6:7, KJV] But when ye pray, use not vain repetitions, as the heathen do: for they think that they shall be heard for their much speaking.


[마 6:7, 킹흠정]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마 6:7, 개역]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KJV] Be not ye therefore like unto them: for your Father knoweth what things ye have need of, before ye ask him.

 

[마 6:8, 킹흠정]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

 

[마 6:8, 개역]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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